파스타 E08
내 주방에 여자는 너 하나로 충분하다.
괜찮아? 차라리 얼어 죽지 그랬냐.
니가 요리사야? 입 얼었니? 입 얼었냐고 묻잖아 지금.
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.
겁났어요. 여기서 죽어야지 제가 요리사인 거 아는데. 졌습니다. 제가.
살아야지 요리사도 되고 그럴 것 같아서.
재료들은 다 죽여놓고 요리사만 살겠다.
고맙다. 살아줘서.
셰프는 제가 셰프 좋아한다고 제가 우스우세요?
제가 셰프 훨씬 더 좋아하는 거 같으니까 만만하죠?
왜 얼어 죽으랬다, 괜찮은 놈이랬다, 니가 요리사냐 그랬다, 진국이랬다,
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세요?
그게 내 탓이야?
그럼, 누구 탓이에요?
니가 잘했다 못했다 그러니깐 그러지.
니가 마음에 들었다 안들었다가 하니까 그러지.
예, 죄송합니다. 그것도 제 탓이네요, 그러면.
너 왜 이래 진짜.
셰프는 주방이 싫으면 뛰쳐나가고, 여자가 싫으면 해고 해버리고,
자기 멋대로 자기 맘대로 살아서 진짜 좋으시겠어요.
그래, 좋다.
네, 저는 애송이고, 초보고, 남들 눈치 보는 게 일인데
셰프는 뭐든지 나 눈치 줄 일만 있어서 진짜 좋으시겠어요, 그쵸?
그래, 좋다. 야 그래가지고 내 마음대로 된 게 뭐가 있는데?
한 번도 아니고, 몇 번 씩이나 해고된 너는 방금 전까지 주방에서 사고나 치고.
얼어 죽으래도 안 얼어 죽고.
얼어 죽을까 봐 뜨거운 거 사 줘도 싫다고 바락바락 대들기나 하고.
나, 나 좋다고 나 편하게 아주 잘 먹고 잘살고 있다 왜.
내 주방에 여자는 없다면서 저는 왜 쓰시는 거예요?
이제 주방에 여자가 둘씩이나 돼서 어떡하실래요?
너 입 안 다물어.
좋으시겠어요.
한마디만 더해 진짜.
그러니까 왜 사람 마음을 이랬다저랬다 헷갈리게 하시냐고요.
왜 제 마음까지 칼질하고, 두드리고, 소금 뿌렸다가, 설탕 뿌렸다가,
지지고 볶고 왜 요리를 하시려고 하세요?
도마 위의 생선입니까, 제가?
나 너 가지고 요리 안 한다.
칼자루 쥐었다고 두려운 게 없죠.
다듬다가 가시에 찔릴 수도 있고요,
먹다가 목에 캑 걸려서 저세상 갈 수도 있어요.
모르시죠.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은 칼 하나도 안 무서워해요.
살 속에 가시 품고 뾰족하게 숨어 있지.
그래서.
저도 가시는 있다고요. 누구한테나 가시는 있어요.
그래서.
가시 조심하시라고요.
너는 신선하지도 않고, 잡은 지도 한참 됐고, 유통기한도 얼마 안 남은.
그거뿐인 줄 알아? 다듬기도 힘들고, 손도 많이 가고,
공들여도 양도 얼마 안 나오는, 데코 해봤자 예쁘지도 않은.
암튼 너 좋은 식재료 아니야.
나는 고로 너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질 안 한다.
요리 안 한다고. 됐냐?
그러니까 도마 위에서 내려가라고.
도마에서 내려가라고 하시는 건,
이미 도마 위에 올라갔는데 내려가라고 하시면은,
다음은 쓰레기통밖에 없잖아요.
마음을 버리라는 말씀이세요?
파스타 (Pasta) / 움짤 GIF
이선균 / 최현욱
공효진 / 서유경